공지사항 보도자료
제 목 |   제2회 과학기술, 예술을 만나다 포럼
작성자 |   관리자   (heretwo@postech.ac.kr)
작성일 |   2006년 10월 26일





 

한국과학문화재단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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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 10. 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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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과학기술, 예술을 만나다’ 포럼 개최

-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기술적 창의성 결합의 장 마련 -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기술적 창의성의 결합을 통해 과학기술 분야와 예술 분야 모두의 지속적인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포럼이 개최된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이사장 나도선)은 과학기술계와 인문사회계 및 예술계 모두가 상호 협력하고 공동 발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추진하는 ‘새로 보는 과학기술’ 관련 포럼을 오는 10월 31일 서울 예술의 전당 문화사랑방(서울서예박물관 4F)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제 2회 과학기술, 예술을 만나다’ 포럼은 과학기술부 김우식 부총리 주재로 2차에 걸친 예비모임을 가진 바 있으며, 지난 9월 27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던 ‘제 1회 과학기술, 인간을 만나다’ 포럼을 잇는 두 번째 행사다.


이번 포럼은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의 ‘예술과 과학, 그 만남의 세 모습’이라는 기조강연을 필두로 시작된다. 각 분야별 주제를 살펴보면 미학 부문은 ‘예술, 진리, 과학적 인식’(임홍빈 고려대 철학과 교수), 음악 부문은 ‘음악의 과학적 실체, 서양음악을 중심으로’(이여진 이화여대 작곡과 교수), 미술 부문은 ‘과학기술과 시각예술 : 주요 쟁점과 전망’(성완경 인하대 미술교육학과 교수 겸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이다.


과학술계에서는 양현승 교수(KAIST 컴퓨터공학부)와 성굉모 교수(서울대 전기전자공학부)가, 인문학계 및 사회학계에서는 김용석 교수(영산대 문화철학)와 김기정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가, 예술계에서는 이명옥 관장(사비나미술관)과 서승택 실장(아트센터 나비 학예실장) 등이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예정이다. 이어 참석자 전원의 질의응답 순서도 마련돼 있다.


한국과학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번 포럼의 의미에 대해 “학부생 이상 과학기술학 전공자와 미학 및 음악․미술 등 예술 전공자에게는 관련 분야에 대한 폭넓은 안목과 식견을 제공하고, 일반인에게는 21세기 과학기술 주도형의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기술이 우리 삶의 방식과 예술․문화활동에 어떻게 투영되고 영향을 끼쳐 왔는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포럼 관련 자료들은 한국과학문화재단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및 예술 관련학과 홈페이지에서도 검색할 수 있도록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포럼은 대학교 학부생 이상 일반인이 무료로 참관할 수 있다.


별 첨 : “예술과 과학, 그 만남의 세 모습(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원고 1부. 끝.




예술과 과학, 그 만남의 세 모습


김병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인간의 역사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처럼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이 치열하게 이루어진 적은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드러나게 혹은 숨어서 문학과 영화, 혹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전반에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며 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과학과 기술이 20세기의 후반기에 들면서 전자공학으로부터 우주과학, 생명공학으로부터 정보 기술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성과를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 속으로도 적극  확산시켜 들어간 때문일 것이며, 예술 역시 과학 못지않게 그 주제와 수법, 인식과 상상력에 이르는 미학적 작업 전반에 걸친 커다란 쇄신과 실험에서 주저 없이 과학 기술을 끌어들인 때문이다. 이렇다는 것은 과학과 기술이 그 변화를 과학 기술의 내부적 진전만으로 자제하지 않고 우리 삶의 일상 내용과 의식의 전반에 뛰어들어 자극하고 참여하며 함께할 만큼 역동적이면서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 생활에 패러다임적 전환을 추동하였다는 것, 예술 역시 이러한 변화들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도전적으로 자기 변용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반증해줄 것이다. 나는 과학과 예술의 이러한 만남의 양상을 세 측면에서 점검해보고 싶다.


  헐리웃의 영화예술에서 오늘날 가장 자주 이용되는 소재 중 하나가 가상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모험이다. 그 모험의 세계는 공룡이 지배하던 아득한 과거이기도 하고 어떤 형태의 변화를 마주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앞으로의 몇 세기 후의 미래이기도 하며 그 모험의 대상은 신종 바이러스이기도 하고 로봇이 인간을 통치하는 권력이기도 하며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 우주의 위협이기도 하다. 이 장르의 영화들은 모두 현대 과학 기술의 갖가지 면모들을 거대한 화면에 가득 채운다. 문학은 이들 영화처럼 스펙터클하지 않은 대신 보다 일찍부터 그리고 보다 진지하게, 과학이 우리의 미래에 어떻게 펼쳐지고 그래서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지를 상상해왔다.

  미래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예술가들의 상상은 과학기술자의 전망과는 대체로 상반되고 있다. 가령 「블레이드러너」며 「터미네이터」 같은 과학미래영화들은 사이보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은 억압당하거나 축출당하는 음울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고 「가타카」는 가짜의 유전 인자로 출세를 꾀하는 생명공학의 왜곡된 장래를 그려보고 있다. 과학기술자들과 미래학자들은 갖가지의 기술과 발명들로 한없이 늘어나는 생활의 편의와 물질의 풍요, 의료의 혜택을 들어 인류의 진보를 믿으며 희망의 내일을 약속해주고 있는 데 반해, 영화와 문학의 예술가들은 이처럼 불길하고 비관적인 전망을 숨김없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부정적인 시각은 과학이 세계의 형태를 압도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초의 매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인간이 만든 과학에 의해 인간 스스로가 파멸하리라는 암울한 예언을 한 이후 1930년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40년대 오웰의 「1984년」에 이르기까지 끈질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학-미래소설들은 과학과 기술의 성장과 발전이 문명의 풍요를 만들어내겠지만 정작 인간의 역사는 누추한 모습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상반된 시각이 나오는가.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도식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과 예술 간의 보다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인데, 「매트릭스 3」에서 시사되고 있는 자유와 운명의 싸움처럼 미래 전망에 있어서의 예술과 과학의 인식론적 대립은 쉽게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근래의 내가 다른 측면에서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은 과학과 기술이 예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삼투 현상에 대해서이다. 나는 원고지에 육필로 쓰던 것에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문건을 작성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글쓰기의 행태와 글의 형태가 과연 변할 것인지, 변한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었다. 직업적인 문필가들에게서 큰 변화를 짚어보기에는 빠를지 모르지만 일반 대중들의 글쓰기, 가령 메일이나 댓글을 들면 그 변화는 잘 보인다. 문장이 짧아지고 가벼워지고 거칠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변하고 있음이 벌써부터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이 현상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어휘가 표준화되고 문장이 정확하며 문체가 공용화하는 근대적 문자생활의 정착 이후 새로이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의 전조가 될지도 모른다. 필기도구의 변화와 용지의 비용, 다시 말하면 지식의 창조, 보존, 전수의 경비가 문필 작업의 태도와 방식을 은근히 변화시키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컴퓨터에 의한 새로운 ‘글치기’ 도구가 문자 행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 창작 문학의 형태도 적지 않게 변모할 것이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새로운 문물들이 가하는 영향은 문학보다 다른 예술에서 보다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음악에서의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새로운 악기들의 개발과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음향의 합성ㆍ변주ㆍ녹음ㆍ재현의 기술들이 종래의 음악 연주 개념을 바꾸어놓기도 했거니와, 백남준은 이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전자 기술을 응용한 비디오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함으로써 세계 예술사의 엄청난 비약을 성취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진전을 이룩한 것은 영화이다. 과학 기술에 의해 새로이 개발된 예술장르인 영화는 그럼에도 과학문명이 인간 운명에 몰고 올 비정한 힘들을 향해 의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다시 그럼에도, 그 작품들의 기술적 부문은 바로 첨단의 과학적 조작에 의지하고 있다. 컴퓨터가 생기지 않았다면 미래의 암울한 세계를 이끄는 과학기술 문물에 대한 예술가들의 비판이 덜 강경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비판들은 컴퓨터 기술들이 가능했기에 더욱 날카롭고 강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글쓰기로부터 고도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영상 제작에 이르기까지 과학 기술들이 그 예술작품을 즐기는 독자와 관객들이 미처 알아챌 수 없도록 엄청난 힘을, 그러나 아주 슬그머니, 삼투해 들어오는 기지를 발견한다. 과학 기술의 첨단적 능력들이 발휘하는 효용성과 능률성은 당연히 예술 작품의 형태와 질을 변화시키고 그 성과를 고조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의 정서적 내면을 재조정한다. 가령 「괴물」에서 얻을 기술적 재치와 「타짜」에서 느낄 재미의 성격은 과학적 호기심과 본능적 쾌감이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관객의 감수성을 유인할 것이다. 맥루한은 같은 정보도 그 입수 통로가 핫미디어인가 쿨미디어인가에 따라 다른 정서적 반응을 얻는다고 분간했지만, 영화에서 얻는 재미도 과학적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것과 전래의 삶의 열정을 확인해주는 것에 우리의 인식과 정서를 다른 방향으로 재조직해줄 것이다. 

  지난 세기의 전자문명 도입, 컴퓨터와 CD 등의 개발과 확산, 그것들의 생활화가 새로운 예술 장르들을 만들어냈고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창작 기법들은 그 작품들을 더욱 정교하고 사실적이고 혹은 환상적이며 상징적으로 만들어냈다. 과학과 기술이 뒤에 숨고 밑에서 움직이며 일구어온 예술에의 이러한 발전과 변화들은 결국 예술의 개념과 방법론 자체까지 수정토록 만들고 그리하여 삶의 감각과 세계에의 인식, 그리고 존재론적 감수성을 변화시킨다. 과학과 기술이 예술을 바꾸었고 그것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바꾼 것이다.

  이 변화의 연쇄 고리에 과학의 거대한 위력이 숨어 있다. 그 위력은 현대적 문명에 대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바로 과학기술의 권력에 대한 예술적 비판까지도 과학기술로 수행토록 함으로써 예술의 기술화에 성공한다. 이것은 결국 예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귀속시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80년 전의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를 상실’한 세계의 예술적 세속성을 지적했는데 지금의 우리는 아마도 그 반성조차 의식하지 못할 과학 편재시대의 예술 기술화 자리에 와 있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 창작 과정 속으로 휘어들어오는 과학기술의 침투와 그것의 창작적 수용이 어떻게 예술의 장인 정신과 아름답게 화해하여 상생할 수 있을지 예술가들은 고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좀 엉뚱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화학자 케쿨레는 벤젠 분자 구조 형태 해명에 몰두하는 어느 날 잠시 졸다가 그 선잠에서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 분자 구조가 링 상태로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마 우리의 소설가 박상륭씨라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모습에서 불교적 윤회의 이미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쿼크 이론을 개발하여 1969년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머레이 겔만은 케쿨레의 이 일화를 소개한 후 그 자신도 잘못 뱉어낸 말 속에 오히려 진리가 숨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과정을 고백하고 나서 바로 그런 과정을 19세기의 헤름홀츠가 말한 ‘포화’ ‘부화’ ‘해명’, 그리고 여기에 포앙카레의 ‘검증’을 덧붙여 진리 발견의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의 문제에 대한 모든 관심과 사유의 집중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문득 부화해서, 하나의 달걀이 어미 품에 오래 안긴 끝에 문득 깨어나듯이, 돌연한 진리 해명의 알을 깨게 되고 그런 후 사후 검증으로써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겔만이 설명하는 과학적 난제의 이 같은 해명 과정은 놀랍게도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과  일치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하나의 정확한 이미지를 찾아내기 위해, 조세희씨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두 구절을 쓸 때 밤새 너댓 잔의 커피를 마시고 두 갑의 담배를 피워댔던 것처럼, 몇날며칠을 쉼 없이 자신의 내면속에서 꿈틀거리며 방황하고 싸우고 껴안다가 어느 순간 문득 폭발하듯이 튀어나오는 이미지를 포착하여 언어와 영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예술 창조의 극적인 계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1981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로알드 호프만은 몇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데 과학적 발견이나 예술적 창작이 “집중력, 객관성, 간결한 표현으로 장인기질을 발휘하는 창조적 행위”라는 공통성을 지적하면서 그 차이는 다만 “과학이 하나의 답을 찾는 것에 비해 예술은 많은 답이 있는 문제에 몰두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내게 이런 과학 지식을 가르쳐준 「과학의 정열」(이숙연 옮김, 다빈치 펴냄, 2001)의 편자 앨리슨 리차드는 “과학자는 창조적인 예술가에 더 가까워, 천직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초조, 애정, 절망, 매혹”이라는 예술가적 감수성을 과학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과학자가 예술에서 이 같은 인간다움을 배워오기를 권고한다면 예술가들은 과학으로부터 무엇을 얻어올 것인가. 나는 앞서 과학과의 만남에서 예술가들이 드러내는 부정적 세계 인식을 진단하고 예술에 틈입해와 그 예술을 변형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힘에 경탄했고 진리 또는 진실에 도달하는 내면적 과정의 유사성을 주목한 바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예술가들이 과학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 들여야 할 것은 과학적 상상력을 통한 엄격함과 통찰력, 진리에의 진정성과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의 겸손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과학적 인식과 태도가 과학 기술이 창조해내는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예술가의 비판적 의지와 사유를 유효하게 만들 것이다. 과학이 예술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예술을 기술화하듯이, 예술은 과학의 발견술(heuristics)을 수용함으로써 과학의 성취 뒤에 숨은 오만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예술적 창조와 과학적 발견의 태어남이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면, 그 결과로 나타날 결론에서 과학자와 예술가는 다시 만나 그 책임을 함께 나누어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러다이트를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과학기술의 위력이 인간의 인식과 사유, 삶의 감각과 실제, 예술 창작의 개념과 수법에 전면적으로 작용할 것이기에 책임의 공유라는 새로운 과제는 과학의 세기에 예술의 운명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의 틀림없이 고통스러운 책무가 될지도 모른다. 미래를 향한 과학과 예술의 진정한 만남은 아마도 이 어려운 책무에서 그 입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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