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보도자료
제 목 |   제1회 과학기술, 인간을 만나다 포럼
작성자 |   관리자   (heretwo@postech.ac.kr)
작성일 |   2006년 09월 21일
첨부파일 1 |  
20060927forum.hwp






한국과학문화재단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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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배포일

 '06. 09. 19(수)

문의

과학문화연구소

홍보미디어실

 변재규 02-559-3898

 장미경 02-559-3852

“제1회 과학기술, 인간을 만나다” 포럼 개최

-문학적인 측면, 역사적인 측면, 철학적인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다양한 관계 조명-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각과 반응을 수용하고,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및 예술분야 모두의 지속적인 공동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포럼이 개최된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이사장 나도선)은 과학기술계와 인문사회계 및 예술계 모두가 상호 협력하고 공동 발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오는 9월 27일 서울프라자호텔 22층 덕수홀에서 “제1회 과학기술, 인간을 만나다” 포럼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은 그 동안 과학기술부 김우식 부총리 주재의 2차에 걸친 예비모임과, 주제발표자 및 토론자의 실무모임을 통해 이루어진『새로 보는 과학기술』기획의 야심 찬 첫 출발이다.


포럼 진행은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의 ‘과학기술시대의 인간’이라는 기조강연을 필두로, 과학기술과 인간의 내밀한 관계에 대하여 문학적인 측면(강내희 중앙대 교수)과, 역사적인 측면(주경철 서울대 교수) 및 철학적인 측면(엄정식 서강대 교수)에서 심도 있게 살펴볼 뿐 아니라, 과학술계 세 분과 인문․사회․예술계 각각 한 분씩 총 여섯 분의 종합토론이 있은 후, 참석자 전원의 질의응답 순서로 이어진다.


더욱이 이번 포럼의 기획취지 및 내용은 과학기술계의 입장 뿐 아니라, 인문․사회․예술계 등 사회 전 분야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학부생 이상 과학기술학 전공자나 협동과정 전공자에게는 보다 폭넓은 안목과 식견을 제공할 것이고, 일반인에게는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파악함으로써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며, 나아가 요즈음 새로이 화두가 되고 있는 인문계 위기 극복을 재점검하는 귀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한국과학문화재단 나도선 이사장은 2006년 올 한 해에 과학기술과 인간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예술이나 사회에 관한 부분까지를 포함하여 총 세 번의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며, 포럼에서 제기된 의미 있는 논의들에 대해서는 추후 정책에 입안되도록 분석․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별 첨 : 과학기술시대의 인간(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 원고 1부. 끝.



과학기술시대의 인간 : 과학기술, 축복이냐 재앙이냐?


박 이문(연세대학교 철학 특별초빙 교수)



전 세계가 과학기술의 습득과 발전의 차원에서 기선을 잡기 위한 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과학기술과 인간'이라는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원론적이지만 '기술'과 '과학'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기술은 "한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특정한 실천적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 혹은 도구와 그러한 것들을 구사하는 능력"으로 아주 넓게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뻐꾸기 같이 오목눈이의 둥지에 알을 낳고 거기서 깨어난 새끼들이 오목눈이의 알을 밀어내게 하고, 어미 오목눈이가 잡아 온 먹이로 제 새끼를 키우게 하는 도둑놈은 말 할 것도 없고, 나뭇가지를 땅 구멍에 집어넣어 그 안의 버러지를 잡아먹던 침팬지, 바다에서 돌로 조개를 깨서 그 알맹이를 꺼내먹는 오토세이를 비롯해서, 거미줄을 쳐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나비나 파리 등을  잡아먹는 거미는 물론 이기적 DNA를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나름대로의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동물들의 생존전략은 본능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 자연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류라는 종에서만 관찰될 수 있는 생존전략으로서의 기술이나 능력과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난다. 원시인들이 돌을 깨서 만든 칼이나 도끼, 또는 독을 묻혀 짐승을 잡는 창은 단순한 본능의 표출 또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습득하고 전수되어 오랜 세대를 거쳐 발전해 온 나름대로의 논리적 사유로 고안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생존전략이며 인간이 제작한 생존 도구로서 문화의 범주에 속하며, 호모사피엔스와 더불어 생겨난 시초의 기술은 곧 문명사의 초석이 되었다.


인류라는 종의 역사를 그 이외의 종들의 역사와 구별할 수 있는 개념을 '문명'이라는 낱말로 규정할 수 있다면, 문명사는 곧 '기술사'이며 기술사는 자연사가 아니라 문화사이다. 우주론적이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적어도 미립자의 차원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모두 시간 속에서 부단한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곧 역사는 아니다. 어떤 방향을 따라 발전하는 변화만이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연에는 있을 수가 없고 오로지 인류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를 제외한 물리적 및 생물학적 현상들에는 그 존재 양식에서 발전으로 볼 수 있는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양식의 변화 과정을 역사라고 한다면, 자연의 존재 양식의 변화에서는 어떤 지향성도 찾아 볼 수 없다. 거의 맹목적이고 반복적인 사건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차이는 기술의 차원에서 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인류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삶의 양식에 발전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이 발전했음을 전제한다.


인류의 역사는 곧 기술 발전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장구한 역사는 곧 기술의 역사였다. 인류의 기술은 장구한 시간을 거치면서 때로는 점차적으로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석기·수렵시대부터 디지털·후기산업시대에 걸친 인류발전의 장구한 과정에서 기술 발달은 단 한 번의 절대적 단절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기술발달사는 편이 상 근대과학 정립 이전과 그 이후의 2단계로 구분해서 검토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다시 문자 발명 이전과 그 이후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첫 시기에는 한 개인 혹은 한 세대가 발명한 기술은 잘 해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직접적 범례나 구전을 통해 극히 제한적이고 아주 느리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 둘째 시기에는 문자적 기록 및 문자인쇄 기술의 발명에 의해서 더 많은 정보가 보다 자세하게 더 많이 그리고 더 넓게 빠른 속도로 보급, 축적 되었을 것이다. 고대 수메르, 이집트, 인도, 중국 및 그리스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잉카 및 아즈텍 등의 유물들이 오늘날 보아도 우리를 압도하는 그 시기의 놀라운 기술을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계의 인류는 전기, 기차, 비행기, 원자발전소, 컴퓨터, 휴대전화, 인공위성, 달로의 비행착륙, 장기이식 등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술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기술발전의 두 번째 단계인 17세기 근대과학 개발 이후의 기술 발전은 기술의 개발과 전수가 단순히 감각적 경험적 지식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으로서의 과학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기술개발과 발전 및 전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 발전이 비약적이며 그 보급이 기하학적으로 넓고 빠르게 폭발했다. 그렇다면 과학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째서 과학은 위와 같은 경이로운 기술발전의 토대가 됐는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삶은 행동의 연속이며, 모든 효율적인 행동은 올바른 자연관을 전제한다. 독사를 썩은 새끼 토막으로 잘못 인식해서 손을 댄 사람은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보는 자연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수많은 자연관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자연관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물활론적·의인적·종교적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유물론적·과학적인 두 가지 대립되는 큰 범주 속에 나누어 묶을 수 있다. 전자의 자연관이 삼라만상의 자연현상의 원리를 어떤 영적 존재의 임의적 조정에서 찾는데 반해서 후자의 자연관은 똑 같은 현상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자연의 기계적인 인과법칙에서 찾는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동시에 독사이면서 썩은 새끼 토막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자연관이 동시에 똑같이 참일 수는 없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 자연관의 진위를 결정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연관에서 논리적으로 유추되는 구체적 결과의 진위에 있다. 독사와 썩은 새끼 토막의 양자 선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자연관에서 논리적으로 유추되는 결과의 진위에 비추어 결정된다. 지난 세기에 걸쳐 근대적·유물론적·과학적 자연관이 전통적·물활론적·의인적·종교적 자연관을 점차적으로 압도하게 된 것은 전자의 자연관이 창출해 낸 현대문명의 수많은 물질적 및 관념적 제품들과 그것들이 동반한 기적 이상으로 경이로운 실용적인 구체적 성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과는 과학기술로만 가능했고, 과학기술은 과학적 자연관 즉 과학이라는 새로운 인식 양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인간에 미친 기여는 아무리 과장해도 충분치 않다. 과학은 인간에게 지적으로는 무지에서 광명의 세계로, 기술적으로는 자연에 의한 억압에서 자연의 정복으로 역전을, 물질적으로는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능케 해주었고, 자연의 주인으로서 자연에 군림하여 번영을 누리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우주는 물론 지구의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간에 불과한 몇 만 년 동안 자연으로부터의 공포에 떨며 연명해 왔던 적은 수의 인류가 지난 천 년 아니 몇 백 년 동안의 폭발적 번식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위와 같은 사실의 충분한 증거가 된다. 과학적 자연관은 문명의 등불이자 꽃이며, 과학기술문명은 인간의 승리이며 축복이다. 이성을 잃지 않은 자라면 오늘날 그 누구도 과학적 자연관을 부정할 수 없고, 축복으로서의 과학기술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과학적 자연관과 그 산물인 과학기술은 상반되는 양면을 갖고 있다. 오늘날 그것들은 빛이 아닌 어두움, 자신의 극한적 한계를 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극한적 절망상태에 이른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문명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어쨌거나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결, 곧 그것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합리적인 대답을 강구하는 작업이다. 과학기술문명의 어둠과 재앙의 징조는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여 분석될 수 있다.


첫째의 어둠과 재앙의 징조는 관념적·정신적인 성격을 띤다. 과학적 자연관은 물질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물질적 분자들로 환원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적 세계, 자아, 영혼, 생명, 감동, 모든 가치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추방하고, 오로지 물질로서의 기계적 작동 원리만을 서술하는데 그침으로써, 인간의 삶은 물론 모든 것을 무의미한 사막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 인간은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정서적으로 빈곤하고, 편안하지만 행복하지 않고 살아 있지만 죽어 있고 부족함이 없지만 공허하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적 기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학적 자연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차디찬 과학적 자연관을 저주하고, 따듯하고 낭만적인 정통적·물활론적·종교적 자연관에 되돌아가 그곳에서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연장이거나 회피에 불과하다. 과학적 자연관은 나름대로 다른 자연관보다 옳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적 자연관에 기초한 자연관에 의해서 고안된 관점과 기술에 의해서 우리는 자연을 나름대로 더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로서 입증된다. 과학을 저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진정으로 원시적, 과학문명의 혜택을 즐길 수 없었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겠는가?


과학적 자연관이 참이라는 주장은 가령 E=mc2라는 수학적 언어로 표상되는 물리현상에 에너지, 질량 및 광속도 사이의 관계가 물리현상을 있는 그대로 표상한다는 뜻이 아니라, 물리 현상이 위와 같은 수학적 공식으로도 기술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똑같은 물리현상은 허다한 측면이 있으며, 필요에 따라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표상된다. 과학적 인식 양식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인식 양식에 비교해서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데 가장 유익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자세히 논증할 여유는 없지만 나는 과학적 자연관 안에서도 실존철학적 입장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마음, 영혼, 감동, 가치, 인생 및 존재 일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째의 어둠과 재앙의 징조는 보다 구체적이고, 더 절박한 현실적인 양상을 띤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거의 무제한적 힘을 부여하였다. 끝없는 욕망을 충족해 온 인간은 마침내 자연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왔고, 핵무기나 생물학적 혹은 화학적 무기에 의한 끔찍한 대량살상과 파괴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 기후변동, 생태계 파괴로 인한 지구의 죽음, 그에 따른 인간 자신의 물리적 조건까지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원천과 책임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과학적 자연관이나 과학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의 무지와 비합리적 욕망에 있다. 문제의 핵심은 놀라운 과학기술로 자연에 군림하게 된 인간이 과학이 보여주고 알려주고 있는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솝의 개구리처럼 자신이 자연이라는 소보다 더 크고 위대함을 입증하려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망각하고 배를 크게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 죽게 된 개구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대과학문명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는 첫 걸음은 바로 우리가 이솝의 개구리의 과오를 깨닫는데 있다.


무조건 과학 그리고 과학 기술을 거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무조건 그것들을 찬양하고 활용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그에 관한 구체적 행동의 선택은 감상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과학의 합리적 자연관에 근거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근시적이 아니라 원시적인 관점에서, 파편적이 아니라 통합적인 큰 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2006년 한국과학사학회의 추계 학술대회
과학문화연구센터 2006년 여름 워크샵